산사처 식구 48명과 함께
날씨 : 눈이조금 날렸고 매우 쌀쌀한 날씨
높 이 |
금정산 제3망루 앞(나비바위) |
위 치 |
부산 금정구 남산동 |
특징/볼거리 |
금정산성 부산광역시 금정구·동래구·북구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 석축산성 사적 제215호. 둘레 1만 7,336m, 높이 1.5~3.2m.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으로서, 지금은 4㎞의 성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 처음으로 축성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의 규모나 축조양식으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에 낙동강 하류에 침입하는 왜구에 대비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금정산성은 조선시대에 중축한 것이다. 1703년(숙종 29)에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남쪽 끝에 있는 동래부의 방비를 위해 금정산에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둘레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 4문이 있는 산성을 쌓았다. 그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둘레 5,643의 중성(中城)을 쌓고, 시설을 보강했다. 1806년(순조 6)에는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을 신축하고 서·남·북 문루를 다시 쌓으니, 그 길이가 32리였다. 산성의 성벽은 이곳에 많은 화강암을 이용해 쌓았고, 수구문·보루·암문 등이 설치되었다. 성 안에 국청사(國淸寺)·해월사(海月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국청사만 남아 있다. 1972년에 동문과 남문, 1974년에 서문과 수구문, 망루가 복원되었다.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쌓은 곳이다. 전체길이는 18,845m이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박태항에게 책임지어 쌓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앞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곳에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성임을 알 수 있으며, 성의 크기나 성벽을 쌓은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숙종 33년(1707)에는 성이 너무 넓다 해서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성을 쌓았고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일단 폐지하였다. 순조 6년(1806)에 성을 다시 고쳤으며, 성벽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동문·서문·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현재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주변의 대규모 방어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일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둘레 1만 7,336m, 높이 1.5∼6m의 우리 나라 최대규모급의 산성이다. 해발 810m인 금정산(金井山) 정상부에서 서남쪽으로 계곡을 포용하여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으며, 동·서·남·북 사방의 성문과 수구문·암문 등의 시설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성은 1703년(숙종(肅宗)29)에 경상 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동래 부사 박태항(朴泰恒)으로 하여금 쌓게 한 것으로서, 둘레 9,011보(步), 높이 15척(尺)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전인 1667년(현종(顯宗)8 )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보수할 것을 건의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보다 더 오래된 시기에 축성되었고 돌보지 않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산성은 낙동강의 하구와 동래 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한 성곽임이 확실하고, 또 성의 규모나 성벽의 축조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축성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 뒤 1707년 (숙종(肅宗)33)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장대(將臺)· 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이후 1774년 (영조(英祖)50)에 이르러 성(城)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려워 일단 혁파하였다. 그러나 1806년(순조(純祖)6)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성을 중수하였으며, 1824년에는 보다 적극적인 경영에 나서서 동문을 신축하였으며 서·남·북문에 문루(門樓)를 만들고 수비군을 배치하였다. 이때의 길이는 32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숙종 이래의 산성 수축 공사의 경위를 새긴 금정산성복설비(金井算城復設碑)가 지금의 동래구 장전동에 건립되었다. 이 산성에는 산성별장(山城別將) 한사람과 군관(軍官) 두사람·진리(鎭吏) 두사람·지인(知印) 두사람 및 사령(使令) 4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쪽 성벽은 산꼭대기부터 500∼600m의 분수령을 따라 험준한 지형과 암벽을 아용하여 요새를 이루고 있다. 서쪽 성벽은 산꼭대기에서 구포방면의 능선과 계곡을 건너 동쪽 성벽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벽은 이곳에 많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1.5∼3m의 높이로 지형의 굴곡과 고저에 따라 쌓았다, 성벽의 요소 요소에는 포루와 암문을 설치하였다. 설치 당시 성내에는 중군소(中軍所)와 군기고(軍器庫)· 산성창(山城倉) 등 수비에 필요한 건물과 군량·군기가 마련되고,국청사(國淸寺)·해월사(海月寺)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국청사만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약 4㎞의 성벽이 잔존하고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그 주변의 대규모 방어 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경영된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1972년 동문과 남문이, 1974년에 서문과 수구문 및 망루가 복원되었다. |
등산시간 |
(휴식포함 약2시간30분 소요) |
등산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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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코스 |
식물원~동문~나비바위(제3망루앞) |
일시, 집결지 |
2010년 3월 7일(첫주 일요일) 집결지 : 금강공원 식물원앞 |
준비물 |
간식, 식수(1리터), 기타개인별.. 회비 2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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