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및 산 이야기/경상도 의 산

100대명산 남산(용장골~삼릉)

갈파람의별 2012. 2. 20. 20:34

 

 

 용장골에서 약20여분 올라 갈림길 용장사지로 올라가는입구 하천을 건너기위해 설잠교를 지나야 한다

 

용장골의모습

 

 

설잠교에서  20여분 된삐알을 올라 용장사지까지 올랐다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용장사”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나서 세종대왕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을 계기로 방랑길에

오르게 되었고, 조선팔도를 떠돌아다니며 많은 시편과 글을 남겼다. 매월당은 용장사에서 문학적 황금기를 보냈는데, 그가 이곳에

서 지은 대표적인 한문소설이 바로 <금오신화>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담았으며, 집구시(集

句詩)인 ‘산거백영(山居百詠)’도 이때 쓴 작품이다. 이후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매월당은 한양으로 올라와 생

활하였으나, 폐비윤씨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길을 나섰다.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茸長寺谷 石造如來坐像)

보물187호(1963.01.21 지정)

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머리 부분은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

가 남아 있는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이다. 어깨는 적당하고, 전반적으로 볼륨이 강조되지 않은 현실적인 체구로 어떤 승

려의 자세를 보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양 어깨를 모두 감싸고 있으며, 옷자락이 대좌(臺座) 윗부분까지 흘

러 내리는데, 마치 레이스가 달린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자연기단 위에 있는 특이한 3층탑이라 생각될 만큼 특

이한 원형(圓形)인데, 맨 윗단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이 석불은 특이한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주며,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유명한 승려 대현(大賢)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유명한 불상이다. 대현의 활동 기간에 제

작되었다고 보아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는 승려 대현과 관련된 불상이라는 점에서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

정하고 있다.
자연석 위에 3층으로 쌓아 올린 둥근 대좌위에 왼손에 보주를 얹고 결가부좌를 한 모습으로 용장사를 내려다 보는듯 앉아 있다. 불

상 자체는 작으나 대좌가 높아 전체 높이가 높다. 현재 머리는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만 남아있다. 어깨는 넓지 않고 다소 좁은

편이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좌측 어깨에는 매듭지어진 가사끈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승려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린 불상”
삼국유사에 승려 대현이 용장사에 머물며 불상 주위를 돌며 기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불상이 ‘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

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현이 불상 주위를 돌며 기도하면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릴 만큼 그의 법력이 높았다고 전한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慶州 南山 茸長寺址 磨崖如來坐像)

보물913호(1987.03.09 지정)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의 뒤쪽 바위벽에 새긴 마애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원만한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내린 옷에는 평행선으로 이루어진 잔잔한 무늬가 밀집

되어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 놓여 있다. 불상은 연꽃이 새겨진 대좌 위

에 양 발을 무릎 위로 올린 자세로 앉아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아직 판독은 어려우나 글자가 10

자 새겨져 있고, 보존 상태도 양호해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용장사지석불좌상(보물 제187호)의 뒷면 바위벽에 새겨져 있다.
연꽃대좌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光背. 부처에게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장식)를 두 줄로

표현하고 있다. 몸광배 왼쪽에는 불상을 만들 때 새긴 10자의 글자가 있으나 마모가 심해 읽기는 어렵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옷

자락무늬가 잔잔하고 단순하게 새겨져 있다. 곱슬머리에 상투모양의 육계를 갖추고 있으며 양쪽의 귀는 길게 늘어졌고 얼굴은 웃

음을 띠고 있다.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등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용장사지에서 마애여래좌상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망해 본다 지척에 고위봉이 보인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능선에서 바라 본 봉화대능선의 대연화좌대(사진 중앙 위의 큰 바위 위의 작은 바위가 연화좌대) 원경

삼화령 :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는 높은 곳을 의미하고 세 곳 수리는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와 삼각

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선덕여왕 시절 생의 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 오라'

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 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시원한 곳에 있게 해 주시

오'라고 했다. 다음 날 그 곳에 가 보았더니 꿈속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 스님은 땅 속을 파 돌 미륵불을 얻어 삼화

령 꼭대기에 모셔 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경덕왕 때 향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 스님이 해마다 삼월 삼일, 구월 구일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

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는데 바로 그 부처님으로 짐작된다. 지금 미륵불은 없어지고 다만 지름 2m의 연화대좌만이 남아 있다. 순

환도로 아래쪽에 절터가 남아 있으나 그 곳이 생의사터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력은 절터 옆에 서 있던 비석이 있으련만 이제 비석

은 사라지고 비석 받침만이 역사의 궁금증을 더해 주고 있다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慶州 南山 茸長寺谷 三層石塔)

보물 186(1963.01.21 지정)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있어 절터였음

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자연암석을 아래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로 바로 윗층 기단이 올려져 있다. 즉, 자연암석이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윗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조각을 새기고 2장의 판돌로 덮어

기단을 마감하였다. 탑신(塔身)은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층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

식은 없어져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없고 쇠막대를 꽂았던 구멍만 남아 있다. 쓰러져 있던 것을 1922년에 재건하였는데, 사리장치는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각 부의 조화가 아름다우며 주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장관을 이루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경주 남산 봉우리에 위치해 전망이 좋고 자연과의 조화가 뛰어나다.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며 금오

신화를 쓰던 곳으로, 지금은 몇 개의 석축만이 그 흔적을 짐작케 한다. 무너져있던 이 탑은 1922년에 복원되었다.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단층 기단을 쌓고 탑신을 세웠다. 머리장식이 사라져 원래의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고, 현재는

3층의 지붕돌(옥개석) 꼭대기에 찰주공(불탑 꼭대기 장식의 중심에 세운 기둥을 끼우는 구멍)만이 남아 있다.

 

 

 

 

 

옛 시라인들의 돌깨는 방법이 옛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3차 탐방시 토함산에서도 여러번 보았긴 했지만...

 

 

 

금오봉 정상까지 올라왔다 오늘 탐방의 기점..

 

하사중 멀리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보인다

 

 

 

상사바위:서쪽 자락에서 보면 웅장해 보이는 바위의 동면에는 작은 감실이 패어져 있다. 감실 옆에는 작은 소불이 놓여져 있고,

반대편에는 남근석이 세워져 있다.

소불의 수인은 소인은 시무외인, 시여원인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감실에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이유로 감실 안은 까맣게

그을려 있다.

「동경잡기」기록에 의하면 상사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일백 열발이나 되는데 그 생김새가 가파르게 솟아 있어 휘어잡

고 오를 수 없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은 이 바위에 빌면 병이 낳는다.
산아당은 금오산에 있는데 아기를 낳는 모양을 돌에 새겨 놓았다. 신라때 자손을 얻고 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가

위와 칼자국이 있다. 위의 기록은 모두 이 바위에 대한 기록이다.
바위 높이는 약 13m, 길이 25m 정도이다. 감실의 크기는 가로 140㎝ 높이 56㎝ 깊이는 30㎝이다. 감실 옆에는 이 근처에서 발견된

80㎝ 크기의 작은 소불이 있고 반대편에는 320×140㎝ 크기의 남근석 세워져 있다. 감실 옆에는 약1m 크기의 소불이 있다

 

"상사바위의 전설"

상사바위에는 할아버지와 피리 소녀에 담긴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예전에 주변의 마을에 혼자된 할아버지와 피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었습니다. 피리는 할아버지를 잘 모셨고, 할아버지 또한 피리

를 무척 아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자신을 보살펴주던 피리가 없어진

것을 무척 허전해 하였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피리를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무에 목을 매어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있었던 후 피리는
밤마다 무서운 꿈을 꾸게 되는데, 꿈에 뱀이 자신의 몸을 휘감고 혀를 내밀어 괴롭혔습니다. 마을 사람

들은 할아버지의 혼이 뱀이 되어 피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에 피리를 괴롭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해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래도 잊지 못하여 그동안 괴롭혔던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고는 국사골로 들어가 바위가 되었습니다.
피리는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여겨 할아버지가 변한 바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피리의 영혼도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 옆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둑바위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경주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坐像)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58호(1982. 02.24 지정)

광배형의 높이 7m, 너비 5m 되는 거대한 자연 암벽에 6m 높이로 새긴 이 불상은 앉은 모습의 석가여래상()이다. 남산

의 좌불() 중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전체적인 느낌은 바위 자체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 조각되어 있는 불상은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너비 4.2m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먼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다. 대좌의 연꽃은 2겹으로 피

었는데, 꽃잎마다 보상화가 장식되어 있다.

이 곳에 있는 다른 불상들의 세련되고 단정한 얼굴과는 달리, 이 불상은 약간 투박한 느낌을 준다. 즉, 눈은 가늘고 코는 길며, 입

술은 매우 두꺼워서, 얼굴 모습이 투박하고 소박한 지방 양식을 보여주는 듯 하다. 옷은 통견()으로 옷주름이 가늘게 선각되었

다. 몸체 뒤에는 다소 굵게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었다.

머리만 사람이 조각을 했을 뿐 몸 전체는 천연의 바위 그대로 두었다. 즉, 몸체에서는 인공적 가공을 생략하고 선각()으로 손

발을 그림으로써 주위의 바위산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러나 머리부분과 몸부분이 각각 다른 시기에 조각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 수법으로 미루어 보아 그 사이에 상

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머리 부분은 8세기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선각으로 처리된 몸부분은

9세기의 기법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바로아래

상선암 전경 - 조그마한 암자로 등산객들에게 식수를 제공한다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三陵溪 石造如來坐像)

보물 666호 (1980.06.11 지정)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이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

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자리잡고 있다. 얼굴은 원만하고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왼쪽 어

깨에만 걸쳐 입은 옷의 옷주름선은 간결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허리는 가늘고 앉은 자세는 안정감이 있다. 대좌(臺座)는 상·중

·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상대에는 화려한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8각 중대석은 각 면에 간략하게 눈모양의 안상(眼象)을 조각하

였다. 하대는 단순한 8각대석으로 되어 있다. 8각의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안상을 비롯하여 당당하고 안정된 자세 등으로

보아 8∼9세기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 불상 높이 1.42m, 대좌 높이 0.96m, 총 높이 2.38m이다. 대담한 상체에 비해서 허리는 빈약하다. 광배

(부처에게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장식)와 대좌를 갖춘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었으나, 발굴 당시 광배의 윗 부분이 파손된 상태로

불상의 대좌 뒤쪽에 방치되어 있었다. 양손은 항마촉지인(오른손을 무릎 위에 얹어 손가락 끝으로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은 모양. 부처가 마귀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상징한다)을 취하고 있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가사는 왼쪽 어깨에만 걸쳤는데 가슴과 팔에 걸쳐진 옷 주름과 두 다리 사이로 늘어진 부채꼴 형 주름은 아름답고 섬세하다.

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이며, 팔각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안상으로 보아 8~9세기 통일신라시대

의 작품으로 보인다.

 

 

 

석조여래좌상의 부근 기암들

 

 

 

아직계곡물은 얼어있다

 

 

삼릉계곡선각육존불(三陵溪谷線刻六尊佛)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1972.12.29 지정)

경주 남산 삼릉 계곡 입구에 있는 선각(線刻 : 선으로 새김)의 마애불상군이다. 불입상이 본존인 삼존상과 불좌상이 본존인 삼존상이 각각 다른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명칭은 따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좌측의 조금 돌출된 바위 면에 새겨진 불입상의 삼존불은 좌우의 두 보살이 무릎을 꿇고 꽃 쟁반을 받쳐 들어 꽃 공양을 하는 모습을 대담한 곡선의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삼존 모두 둥근 두광(頭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이 있으며, 본존 불입상은 얼굴이 둥글고 신체도 풍만한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상들이 머리와 몸체에 알맞은 비례감을 보여 준다.

편단 우견(偏袒右肩 : 왼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의 착의법에 왼쪽 어깨를 넘어가는 대의(大衣 : 설법을 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중의 옷)의 옷단이 삼각형으로 접혀 있다. 허리 밑에서 발 윗부분까지 U자형의 곡선을 그리며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올렸고 왼손은 배 앞으로 들어 양손을 마주하고 있다.

보살상은 가슴 앞에 세 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어깨를 감싸고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가는 천의(天衣 : 천인이나 선녀의 옷) 자락이 몸 옆으로 큰 곡선을 그리며 유연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하체는 연결이 불분명한 부분도 있으나 밀착된 군의(裙衣)를 통하여 드러나는 신체를 표현한 듯, 다리의 윤곽이 간간이 새겨져 있다. 삼존상 모두 특징적인 부분을 포착하여 간략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오른쪽 뒤의 큰 바위 면에 선각된 불좌상 본존의 삼존상도 착의법이나 표현 기법이 거의 같으나 묘사력에서는 뒤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좌상보다 입상의 보살상들이 조금 작게 구성되었고, 삼존 모두 둥근 두광을 새겼으며 본존상에만 신광(身光 :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표시했다.

좌협시는 바위 면의 균열로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본존상은 우견 편단의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에 오른손을 앞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바닥을 위로 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상체에 비해 무릎 폭이 좁고 하체의 표현은 치졸한 편이다. 보살상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왼손은 손끝을 밑으로 하여 배 앞에 대고 있다.

이 상들의 표현은 보살상의 착의법이나 목걸이 장식, 여래상의 소발(素髮 : 민머리)의 표현과 풍만한 신체 표현이 통일신라 초기의 경주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雁鴨池出土金銅三尊板佛)과 가깝게 보이며, 우견 편단의 착의법만 다르다. 따라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제작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꽃 공양의 보살상은 드물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선각육존불이 새겨진 상단부 바위에 오목홈을 파서 우천시 흘러내리는 빗물을 유도 처리하여 선각육존불에 빗물이 흘러내리지 게

한 석공들의 지혜에 감탄스럽다

 

 

 

 

 

 

 

무속인들의 터

 

 

삼릉계석조여래좌상(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은 1964년 8월 동국대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속에서 머리가 없는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삼릉계석조여래좌상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사끈과 아래옷을 동여멘 끈 그리고 아래로 드리워진 두줄의 매듭이매우 사실

적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 라 한다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호 (1972.12.29)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는 이 불상은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이

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은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보관과 함께 이 불상이 현세에서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불상 뒷면에는 기둥 모양의 바위가

광배(光背)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연미에 인공미를 가한 느낌이다.
이 불상은 정확한 연대와 조각자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은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의 소나무 숲속에서 출토되어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삼릉의 소나무숲

 

 

경주 배동 삼릉(慶州 拜洞 三陵)

사적 219호 (1971.04.28)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

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

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

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

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

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배리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

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신라시대 왕릉. 총 3개의 왕릉이 있으며,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 씨계 세 명의 왕이 묻힌 곳이

라 전한다.
※(배리삼릉 → 경주 배동 삼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경주 경애왕릉(慶州 景哀王陵)

사적 222호 (1971.04.28)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으로,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4년이 되던 해에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이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일반

무덤와 같아서 별다른 특징은 없다. 신라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며 발굴된 적은 없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되어있다. 해목령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

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왕릉이라 하기엔 소박한 원형토분 형태이며 능 앞의 상석도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하지만 무덤을 둘러싼 소나무(도래솔)는 삼릉

과 더불어 천년고도 경주시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된다.

“왕의 넋을 기리는 무덤가 소나무”
경애왕이 즉위한 924년은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기였다.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강대한 세력을 떨쳤고 신라는 쇠퇴의 길  걷고 있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밀착해 후백제를 견제하려 했는데, 이를 알아챈 견훤이 927년에 신라를 침공했고, 이때 포석정에

연회를 하던 경애왕은 견훤에게 사로잡혀 강요에 의해 자살했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 왕의 넋을 기리고, 왕의 영혼을 하늘로 올려

보내기 위해 왕릉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경주동부사적지대(慶州 東部 史蹟地帶)

사적 161호(196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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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정한 것이다. 동서는 안압지부터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남의 남

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가 동부사적지대에 해당한다. 월성, 안압지, 첨성대, 계림 등이 각각 하나의 사적으로 지

정 되어있으나, 이들 유적 사이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지하유적과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신라 도성의 중심지역을 보

존하기 위해서 사적지를 연결하여 확대 지정한 것이다. 안압지, 경주월성, 첨성대, 계림, 나물왕릉 등 외에도 수십기에 달하는 신

라 무덤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첨성대

 

최치원선생의 설화가 있는 계림

 

반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