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두째주 일요일(3월11일) 화신님들과 함께 남해 호구산을 올랐다
시산제가 있어서 비교적 짧은 코스... 용문사 주차장에서 도틀바위 정상 용문사 원점회기산행을 계획하였다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인산인해 ㅎㅎ
예년에 비해 많은 산악회가 온듯하다
남쪽 바닷가 가까워서인지 따뜻한 날씨가 봄마중 나온님들에게 더 즐겁움을 준다
용문사 일주문엔 벌써 봄나물 팔려고 자리잡고 앉아있는 할매들...
용문사 일주문에서 오른쪽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을 한다
도로아래 저수지건너 주차장 대형버스 가득
왼쪽 임도로 접어들고
약15분 정도 이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도틀바위가 보인다
가파른 바윗길 ㅠㅠ
저곳까지.. 생각보다 힘든 산행이 될듯 하다
임도와 산길을 만나는 지점 이정표
왼쪽 등로가 있다
향나무숲 시원한바람과 향긋한 내음을 맏으며 지나간다
가파른길 한참올라 바위구간을 또 올라간다
도틀바위오름길
앞 망바위에 먼저올라 ..
돗틀바위도 올려보고
이번산행은 일행들이 많이 있어 혼자 놀기는 안해도 ..
걍 폼만 잡으면 옆에서 찍어준다
내려 보이는 앵강만
시계가 좋지않아 조망이 영~~~~~
도틀바위주변 기암들
꼭 올라가본다 ㅎㅎㅎ
올라온 능선길
바위봉 두개더 넘어 멀리 우측으로 보이는 거대한바위가 호구산 정상이다
도틀바위위 옛 성터 흔적들
세번째 바위봉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정상으로
멀리 금산이 보인다
아우 재준이와
후미팀들에게 명당자리를 양보해주고 ㅎㅎㅎ
호구산 정상이 가까이 보인다
맥문동 군락
정상아래 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데크계단
정상석에서 오랜만에 하트하나 날린다 유휴~~~~
호구산(虎丘山 618m)은 국립공원구역 금산, 설흘산, 망운산과 더불어 남해를 대표하는 산이다
1983년 11월 송등산, 괴음산과 함께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정상부근은 암봉이고 앞에는 앵강만의 풍경이 다도해와 어울려 절경을 자랑한다 왼쪽엔 금산, 오른쪽엔 설흘산이 위치한다
‘호구가 되려고 호구산에 가느냐’ 농 섞인 말에 웃음으로 답했지만 아닌 게 아니라 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사실이다
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호구(虎口)라는 말이 생각나서다
그래서일까 산 아래 남해사람들은 호구산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자 ‘원숭이 원’을 써서 원산(猿山)이라고 부른다
또 산 정상석에는 원숭이의 옛말 납(나무 사이를 날라 다니는 동물)을 빌려 ‘납(猿)산’이라고 새겼다
정작 이 산의 공식 이름은 한자 범호, 언덕구를 써 호구산(虎丘山)이다
해안에서 올려다보면 원숭이 형상이긴 하고 어떨 땐 호랑이 같기도 하다
지리산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긴 하나 바다를 건너올 수 없고 원숭이가 한반도에 있을 리 만무하니
예부터 산이름은 원·호(猿虎)의 유무가 아니라 형상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한양에서 천사십오 리’, 휴대폰도 없던 시절 조정에서 까칠하게 바른말했던 선비를 쫓아 낼 곳은 한양 땅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였다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서른 명이 넘는 선비가 남해에 유배됐다
그 중 한사람이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1637~1692)이다
서포의 유배지는 호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앵강만 바다에 동그마니 떠 있는 노도이다
그는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희빈 장씨에 빠져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숙종(1661∼1720)을 풍자한
국문 소설 ‘사씨 남정기’를 썼다
호구산 봉수대는 이동면 다정리 호구산 정상(626m)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원산이라 했다
이에 대해 신중도 국여지승람 남해현 산천조에는 원산은 현의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고 전하며
호구산 봉수대의 기능에 대해 동쪽으로는 금산 봉수에 응하였고 남쪽으로는 설흘산 봉수에 응하였다고 적고 있다
561봉을 지나 용문사로 하산을 할 계획이었어나 시산제 시간이 임박해서 정상에서 바로 하산을 한다
하산길 약 20여분동안 너덜과 급경사지역 이라 조심조심 하산을 한다
여러가지모양 돌탑들 간간이 세워져 있다
휴~ 좀 편한길이 나온다 싶더니 이내 염불암이 보인다
염불암 불사가 거의 끝난듯 사찰 모양을 갖추고 있다
염불암(念佛庵) : 1708년(숙종34)에 중창 하였다
계곡까지도 손본듯
멋없이 만들어져 있다
염불암에서 도로따라 조금 내려오면 길가에 있는 백련암
백련암 : 조선 영조 27년(1751년) 창건된 수행도량이다
이후 많은 고승이 백련암에서 수행에 전념했다고 한다
근래 들어서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이셨던 용성스님, 전 조계종 종정 석우스님, 성철스님 등이
수행하신 도량이다
요사채에 걸린 편액은 경봉스님의 선필이라고 한다
백련암을 지나
길아래 용문사가 보인다
우리나라엔 세 곳의 유명한 용문사가 있다.
3곳의 용문사 중 북쪽에 위치한 용문사부터 들기로한다.
첫째 : 천 년넘은 은행나무가 있는 경기도 양평 용문사는 용의 머리고,
둘째 : 대장전 불단 및 윤장대가 유명한 이곳 경북 예천 용문사는 용의 심장에 해당되며
셋째 : 지장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남해 용문사는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한다
남해용문사(龍門寺) : 치마폭처럼 펼쳐진 앵강만 바다를 바라보는 남해읍 이동면의 호구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고찰이며
용문사 괘불탱은 1769년(영조 45년)에 제작된 세로 9m, 가로 6m가 넘는 대형 탱화로 2003년 9월 국가지정 보물로 지정된
군내 유일의 보물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로서 802년 (신라 애장왕3) 때 창건된 절로
열 두명의 고승을 배출한 남해 최대의 사찰이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 절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하여 왜군과 싸웠는데, 이 때 절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1661년(현종 2) 학진(學進)이 인근 보광사(普光寺) 건물을 옮겨와 중창하였다
보광사는 원효가 세운 사찰이었으나 이곳으로 옮길 때에는 폐사 직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용연(龍淵) 위쪽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용문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임진왜란 이후 호국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숙종(재위:1674∼1720)때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며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였다
또 이 때 왕실의 축원당(祝願堂)으로 삼았다 1703년(숙종 29)과 1735년(영조 11), 1819년(순조 19), 1857년(철종 8), 1970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천왕각·명부전·칠성각·봉서루·산신각·요사 등이 있으며,
산내 암자로는 1751년(영조 27)에 세운 백련암(白蓮庵)과 염불암(念佛庵)이 남아 있다
용문사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 밑에 용두(龍頭)를 조각해 넣었다 1974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용문사천왕각과 용문사명부전은 1985년에 각각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0호,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백련암은 용성과 성철 등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으로 경봉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용문사석불과 촌은집책판이 각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8호,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용문사석불은 높이 약 81cm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절을 중창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촌은집책판은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유희경(劉希慶)의 시집 《촌은집(村隱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밖에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사용하던 대포 삼혈포(三穴包)와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蓮玉燈) 2개, 촛대, 번(幡), 수국사 금패(禁牌) 등이 있었으나 연옥등과 촛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훔쳐갔다고 한다 절 입구 일주문 오른쪽 언덕에 9기의 부도가 있다
천왕문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아래 주차장으로
시산제 시간에 맞춰 하산을 하고 한해무사 산행을 기원하고 산행 마무리를 한다
渴波濫 許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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