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및 산 이야기/포 토

금오산 용장사지

갈파람의별 2016. 8. 8. 16:40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용장사”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나서 세종대왕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을 계기로 방랑길에

오르게 되었고, 조선팔도를 떠돌아다니며 많은 시편과 글을 남겼다. 매월당은 용장사에서 문학적 황금기를 보냈는데, 그가 이곳에

서 지은 대표적인 한문소설이 바로 <금오신화>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담았으며, 집구시(集

句詩)인 ‘산거백영(山居百詠)’도 이때 쓴 작품이다. 이후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매월당은 한양으로 올라와 생

활하였으나, 폐비윤씨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길을 나섰다.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茸長寺谷 石造如來坐像)


보물187호(1963.01.21 지정)

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머리 부분은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

가 남아 있는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이다. 어깨는 적당하고, 전반적으로 볼륨이 강조되지 않은 현실적인 체구로 어떤 승

려의 자세를 보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양 어깨를 모두 감싸고 있으며, 옷자락이 대좌(臺座) 윗부분까지 흘

러 내리는데, 마치 레이스가 달린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자연기단 위에 있는 특이한 3층탑이라 생각될 만큼 특

이한 원형(圓形)인데, 맨 윗단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이 석불은 특이한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주며,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유명한 승려 대현(大賢)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유명한 불상이다. 대현의 활동 기간에 제

작되었다고 보아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는 승려 대현과 관련된 불상이라는 점에서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

정하고 있다.
자연석 위에 3층으로 쌓아 올린 둥근 대좌위에 왼손에 보주를 얹고 결가부좌를 한 모습으로 용장사를 내려다 보는듯 앉아 있다. 불

상 자체는 작으나 대좌가 높아 전체 높이가 높다. 현재 머리는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만 남아있다. 어깨는 넓지 않고 다소 좁은

편이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좌측 어깨에는 매듭지어진 가사끈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승려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린 불상”
삼국유사에 승려 대현이 용장사에 머물며 불상 주위를 돌며 기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불상이 ‘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

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현이 불상 주위를 돌며 기도하면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릴 만큼 그의 법력이 높았다고 전한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慶州 南山 茸長寺址 磨崖如來坐像)

보물913호(1987.03.09 지정)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의 뒤쪽 바위벽에 새긴 마애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원만한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내린 옷에는 평행선으로 이루어진 잔잔한 무늬가 밀집

되어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 놓여 있다. 불상은 연꽃이 새겨진 대좌 위

에 양 발을 무릎 위로 올린 자세로 앉아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아직 판독은 어려우나 글자가 10

자 새겨져 있고, 보존 상태도 양호해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용장사지석불좌상(보물 제187호)의 뒷면 바위벽에 새겨져 있다.
연꽃대좌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光背. 부처에게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장식)를 두 줄로

표현하고 있다. 몸광배 왼쪽에는 불상을 만들 때 새긴 10자의 글자가 있으나 마모가 심해 읽기는 어렵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옷

자락무늬가 잔잔하고 단순하게 새겨져 있다. 곱슬머리에 상투모양의 육계를 갖추고 있으며 양쪽의 귀는 길게 늘어졌고 얼굴은 웃

음을 띠고 있다.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등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능선에서 바라 본 봉화대능선의 대연화좌대(사진 중앙 위의 큰 바위 위의 작은 바위가 연화좌대) 원경

삼화령 :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는 높은 곳을 의미하고 세 곳 수리는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와 삼각

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선덕여왕 시절 생의 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 오라'

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 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시원한 곳에 있게 해 주시

오'라고 했다. 다음 날 그 곳에 가 보았더니 꿈속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 스님은 땅 속을 파 돌 미륵불을 얻어 삼화

령 꼭대기에 모셔 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경덕왕 때 향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 스님이 해마다 삼월 삼일, 구월 구일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

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는데 바로 그 부처님으로 짐작된다. 지금 미륵불은 없어지고 다만 지름 2m의 연화대좌만이 남아 있다. 순

환도로 아래쪽에 절터가 남아 있으나 그 곳이 생의사터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력은 절터 옆에 서 있던 비석이 있으련만 이제 비석

은 사라지고 비석 받침만이 역사의 궁금증을 더해 주고 있다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慶州 南山 茸長寺谷 三層石塔)

보물 186(1963.01.21 지정)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있어 절터였음

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자연암석을 아래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로 바로 윗층 기단이 올려져 있다. 즉, 자연암석이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윗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조각을 새기고 2장의 판돌로 덮어

기단을 마감하였다. 탑신(塔身)은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층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

식은 없어져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없고 쇠막대를 꽂았던 구멍만 남아 있다. 쓰러져 있던 것을 1922년에 재건하였는데, 사리장치는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각 부의 조화가 아름다우며 주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장관을 이루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경주 남산 봉우리에 위치해 전망이 좋고 자연과의 조화가 뛰어나다.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며 금오

신화를 쓰던 곳으로, 지금은 몇 개의 석축만이 그 흔적을 짐작케 한다. 무너져있던 이 탑은 1922년에 복원되었다.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단층 기단을 쌓고 탑신을 세웠다. 머리장식이 사라져 원래의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고, 현재는

3층의 지붕돌(옥개석) 꼭대기에 찰주공(불탑 꼭대기 장식의 중심에 세운 기둥을 끼우는 구멍)만이 남아 있다.

 

 

 

 

'포토 및 산 이야기 > 포 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영 봉화산 마애불(정토원 아래)  (0) 2016.08.08
대견사지  (0) 2016.08.08
경주 칠불사  (0) 2016.08.08
경주 금오산(남산) 삼릉계곡의 불상들  (0) 2016.08.08
덕주사 마애불(월악산)  (0) 2016.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