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바람 친구들과 함께 하는 산행
오랜만에 울산의 진산 인 문수산을 오른다
율리 옛 농협이 있었던곳 들머리에서..
옛 아기자기했던 산길은 없어지고
조성이 잘된 산길을 따라오른다
잠시후 망해사 갈림길 망해사에 들렀다 가고 싶었어나 친구들 그냥 지나가자고 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망해사
망해사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이 창건하였다. 당시에는 망해사라는 이름 이외에 신방사(新房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권2 〈처용랑망해사조〉에 따르면,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현재의 울산광역시)에 유람을 다녀오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에
덮여 길을 잃고 말았다.
신하에게 물으니 동해의 용이 심술을 부린다며 좋은 일을 해야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해 근처에절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름이 걷히더니 동해의 용이 아들 7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용은 왕의 덕을 칭송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용은 또한 아들 하나를 보내 왕을 돕도록 하였으니 그가 바로 처용(處容)이었다.
왕은 뒤에 영취산 동쪽에 절을 지어 망해사 또는 신방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960년대에 절을 중창하면서 출토된 기와에 적힌 명문(銘文)에 따르면, 1544년(조선 중종 39)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하나, 1786년(정조 10) 편찬된 《울산부여지도(蔚山府與地圖)》에는 망해사가 영취산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17∼18세기에 다시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나오지만, 1899년(광무 3) 편찬된《울산읍지》에는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어 1861∼1899년 사이에 폐사된 듯
하다. 1957년 영암(影庵)이 중창하고, 1988년부터 혜학(慧學)이 대웅전을 중건하는 등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에 망해대(望海臺)가 있어서 멀리 바다가 보이므로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 시를 읊었다는기록이 있다.
실제로 정포(鄭浦)가 지은 〈망해대〉라는 시가 전하나, 현재의 절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절이 있는 곳에서 산 정상 쪽으로 100m쯤 올라가면 넓은 터가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는 바다가 보여 이곳이 망해대터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종각·요사채 2동이 있고, 유물로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73호로 지정된 망해사지석조부도 2기가 있다.
2기 모두 대웅전 북쪽 50m 지점에 동서 방향으로 서 있으며 형태가 똑같아 고승 1명의 사리를 나누어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동쪽 부도는 일제강점기 때 도굴당하여 마멸된 채 쓰러져 있던 것을 1960년에 복원 하였으나 상륜부는 소실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1990년 11월에 다시 복원하였다.
문수산이보이고
건너 남암산도 보인다
영축산 갈림길 영축산에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야 한다
영축산으로 오르는길
영축산 정상
문수산을 중심으로 영축산과 남암산이 좌우로 솟아있는 산 군
돌아 내려오는길 앞 문수산이 보인다
다시 돌아내려온 삼거리
문수산을 오르면서 기암
이곳산의 바위들은 화강암은 아닌듯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 운치가 있어 보인다
갈딱고개로 내려서는길 나무데크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안부 갈림길
바람이 제법 매섭게 차갑다
여기서 부터 정상까지 ...유명한 깔딱고개 구간이다
숨고르기를 하며 뒤돌아본 영축산
역시 깔딱고개
문수산의 대명사 이긴하다 고약하게.... 암튼 정상에 올랐다
문수산
청량면 율리의 서쪽에는 웅촌면, 범서면, 삼남면 등 4개면의 경계를 이루는 문수산(600m)이 우뚝 솟아 있다. 문수산은 일명 청량산이라 하기도 하며 울산시 남쪽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은 문수보살이 산세가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워 여기에 와서 살았다하여 처음엔 청량산이라 불리워지다가 후에 문수산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후한 영평 10년에 마동, 축법란 등이 이 산에 올라 암자를 지었으며 뒤에 두순, 도선 등 큰 스님들이 살았고, 고려때에는 라마교의 전당이었다고 한다. 강원도 오대산에 불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과 월정사가 있어 불교에서 유래된 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곳 문수산도 그 동쪽의 영축산과 같이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에는 신라 때에 세웠다는 문수암이 있고 주변 청량면의 이름도 이 청량산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시가지
날씨가 흐린탓으로 선명하게 잡히진 않는다
건너보이는 남암산
힘들게 올랐던 정상 ㅎㅎ 반대편에 차량이 올라와 있다
반대로 내려가는길 잠시 찻길로 내려가다가
왼쪽 등로따라 문수사로 내려 간다
나무계단길
절집에서 가꾸고 있는 채소밭
한적한 길 가을과 겨울을 걷고 있다
문수사가 보이기 시작 한다
문수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창건되었으나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절이 자리한 문수산은 신라와 고려 때는 영취산(靈鷲山) 또는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하였다. 면 이름 청량면은 바로 아 청량산에서 유래하였다. 1799년(조선 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신격호(辛格浩)의 시주로 대웅전을 중창하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범종각·산신각·종무소·요사채 등이 있다. 산신각 뒤에 화강암으로 제단을 쌓고 모신 대형 불상이 있다.
《삼국유사》 권5 〈연회도명문수점〉편에 문수보살과 변재천녀(辨財天女)에 얽힌 설화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연회라는 승려가 이 절에서 매일 《묘법연화경》을 읽자 연못에 있는 연꽃이 사시사철 시들지 않았다. 이에 원성왕이 신기하게 여겨 연회를 국사(國師)로 초빙하려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연회는 서쪽 고개 너머로 달아났다. 그가 고개를 넘자 밭을 갈던 한 노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어 나를 매어 두려고 하므로 피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노인은 ‘수고롭게 멀리 갈 필요가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5리쯤 더 가다가 이번에는 시냇가에서 노파를 만났다. 노파도 그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앞서 노인에게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노파는 ‘앞에 만났던 노인은 문수대성(文殊大聖)인데 왜 그 말을 듣지 않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연회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급히 돌아왔다. 뒤에 연회는 궁궐에 들어가 국사가 되어 많은 일을 하였다. 당시 연회가 만났던 노인은 문수보살이고, 노파는 변재천녀였다고 한다. 그래서 연회가 넘었던 고개를 문수고개, 변재천녀를 만난 곳을 아니고개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또 무거(無去)설화도 전한다. 경순왕이 나라의 장래를 문수보살에게 계시받고자 두 왕자와 함께 문수사로 가는 길에 동자승을 만났는데, 동자승이 왕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이에 문수대성에게 계시를 받고자 한다고 하였다. 동자승은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서갔다. 일행이 태화강을 건너자 갑자기 동자승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경순왕은 하늘이 자신을 져버린다고 탄식하며 환궁하여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동자승이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無去)라고 하고, 왕이 탄식한 곳을 헐수정이라고 한다.
절집 규모가 옛날에 비해 엄청 크져 있다
건너 남암산을 한버더 바라본다
오늘 저곳까지 갔었어야 되는데 ㅎㅎㅎㅎ 오늘은 친구들과 간단하게..
하산길 협곡옆으로 아슬아슬 길과 옛날 클라이머들이 즐겨 찿았던 암장 사이로 내려간다
소나무 연리목을 지나 조금 내려서면 주차장이 나온다
간단한 산행 마무리 하고 친구들과 작천정 등억 온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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