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산행기록

제 1824차 산행 충북증평 좌구산

갈파람의별 2022. 8. 23. 23:15

좌구산[坐狗山 658m]

 

위치 : 충북 증평군

일시 : 2022. 08. 20.(토요일) 무경이와 함께(산하산악회 동행)

날씨 : 많이 더웠음

산행코스 : 휴양림 입구~명상가든~명상구름다리~전망대~거북공원~자작나무 쉼터~데크쉼터~좌구산 천문대~좌구산~

바람소리길~휴양림 주차장

 

특징, 볼거리

충북 괴산군과 청원군에 걸쳐 있는 좌구산은 증평읍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나 널리 알려지지 않아 등산로도 제대로 갖춰

지지 않은 곳이다. 전체적으로 수림이 우거진 육산으로 호젓한 산행을 즐기기에 알맞은 산행지이며 장마끝무렵에는 온 산

에 버섯이 지천으로 피어 등산객들의 손을 심심치 않게 한다

 

"앉을 ´(자 거북 ´(.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해서 좌구산이라 쓴다. 그런데 원래는 그게 좌구산(坐狗山)

이 아니고 앉을 ´(자 개 ´(. 좌구산(坐狗山)이었다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전에는 민가가 없이 산밖에 없었

는데, 그 산에 올라가면 개짖는 소리가 났다고 하여 좌구산(坐狗山)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풍수적으로 말해서 좌구산(坐狗

)으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증평에서 청안을 거쳐 청천쪽으로 가다보면 칠보산과 좌구산의 중간지점 쯤 되는 곳에서 봉천사 입구인 고개가 질마재

고개다  이 고개를 넘어 조금 가면 봉씨가 난을 피해 살았다하여 봉천리라고 이름 지은 마을이 있다

 

1106(고려 예종 1) 어느날, 경기도 강화군 하첩면 장정리 하음산 기슭 연못가에 상서로운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서 비

가 내리쳤다.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겨 살펴보니 못 수면에 돌로 만든 상자가 떠 있었고, 그 상자 속에는 귀여

운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는 이 아기를 궁중에 바쳤고 왕은 기이하게 여겨 왕실에서 키우도록 했다. 노파가 봉헌했다 하여 성을 봉()이라 하고

장래 국가를 도울 인재라 하여 이름을 우()라 붙인 '봉우'를 시조로 하는 하음 봉씨들의후손들은 그 후 많은 인재들이 등

용됐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동료인 김질의 배신으로 발각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들은 박팽년의 매부 봉여해는 세조를 살해하기 위해 칼

을 차고 어전으로 가던 도중 의금부에 붙잡혀 화를 당했다 당시 그의 벼슬은 궁중요리를 검사하는 사옹원별좌였기에 어전

출입이 쉬웠다 한다

 

봉여해는 어려서 재주가 뛰어나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함께 박중림(박팽년의 아버지) 문하에서 수업, 학문을 떨쳤고 박중림

의 사위가 됐다

 

봉여해가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 모의에 참여했다가 화를 당한후 세조 이후에는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고, 화를

면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던 중 일부가 이곳에서 살게 됐다 한다

 

외봉천에서 서쪽으로 약 1km쯤 떨어진 망월산(해발 459m : 망탑봉)이 있어 이곳에서 보면 미호평야와 증평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이곳에 사는 봉씨들은 강화도를 쳐다보며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도 하고, 난을 피하는 사람으로 감시의 역할을

한 산이기도 하다

 

망탑봉에서 보면 군사적 요충지인 두타산성, 이성산성, 구녀산성과 북이면 부연, 토성, 광암의 경계가 되는 낭비성, 삼보산

맥들이 한눈에 보여 군사적 요충지로 적진의 활동을 탐색하고 감시하는데 적지임을 알 수가 있다

 

남봉 김치(金緻 : 1577~1625)1597(선조30)에 알성문과 병과로 급제, 설서(設書 : 세자시강원의 정7)를 거쳐 1608

에 조정 관리들의 휴가연수를 담당하는 사가독서를 담당했다

 

광해군 때 사북시정, 이조참의, 동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홍문관교리, 부제학등을 역임하고 정3품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

직사건으로 파면됐다

 

이이첨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돼서는 영창대군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을 공격하기

도 했다

 

그는 충남 병천면 백전리에서 괴산 능촌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신변의 위

협을 느끼던 차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에 자기의 관상을 보니 그해에 죽게 됐는지라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

문불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변성을 만나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과 사전에 내통해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정세변화에 따라서 왕위를 위협할 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학정을일삼으므로 인헌황후(좌찬성 구사맹의 딸)의 아들인 종(, 인조 : 1595-1637)은 조정에 대

북파와 견원지간인 서인 일파와 경기 · 충청지방의 관리들을 포섭해 반정을 일으킬 것을 모의한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기 전 어느 여름날 심기원이 그를 찾아와서 능양군(인조)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기에 이곳 율리의 물

치폭포에서 목욕한 후 소반에 보를 놓고 점을 쳐 보니 임금이 될 쾌인지라 이를 극비로 하고 반정을 일으킬 날을 잡아 주는

데 천파일로 잡아주고 심기원의 심복이 될 것을 다짐한다

 

그가 밀담을 마치고 오랜 노독으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난데없이 한 밤중에 동편 산에서 개가 짓는 소리가 3번 들리므로

그는 잠에서 벌떡 일어나 "이 앞산이 무슨 산이냐?" 하고 물으니 그의 심복 하나가 대답하기를 "이 산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구산이라고 합니다"하니 점술을 연구해 천문에 밝고, 풍수에 조예가 있는 백곡 김치는 말하기를 "

니다 저곳에서 개가 3번 짖었으니 저 산은 좌구산이 틀림없다"하면서 "누가 염탐을 하러 오는 것이 틀림없으니, 이곳을 빨

리 떠나자"하고 서둘러 모두 이곳을 떠나므로 난을 무사히 피했다고 한다

 

그 후 인조는 1623313일 밤에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의 병력 700여명과 능양군이 이끄는 친병과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여명이 합세해 인조 반정을 성공시킨다

 

김치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다시 유배에서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인조3)에 경상도 관찰사가 됐으나 그 해에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을 괴산 능촌으로 모시려했으나 상여가 이곳 율리재를 넘을 때 명정이 바

람에 날려 현재의 그의 산소 자리에 앉으므로 그 곳에 안장했다고 그 후 후손들이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지낸 보천에서 율리에 이른 깊은 골짜기를 뜻하

는 심고을 그의 호로 정했을 가능성과 유배를 당할 때는 근처에, 산소의 우연성으로 미루어 이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

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