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및 산 이야기/경상도 의 산

경주 국립공원 옥녀봉과 선도산을 다시 찾아서

갈파람의별 2022. 9. 16. 11:15

큰갓산(235)과 옥녀봉(玉女峰·276)은 석장동 일대를 둥글게 끌어안은 형세다

정상부의 모습이 갓처럼 보여 큰갓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옥녀봉은 전국에 흔한 산이름이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 다른 봉우리인 송화산은 그 출처마다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지역 주민들은 옥녀봉 서쪽 233봉을 송화산으로 부른다고하니 헷갈린다

큰갓산도 235봉에 경주시가 세운 정상석이 있는데 지형도에는 직전 215봉을 정상으로 표시했다

 

형산강과 경주 시내를 배경으로 선사시대 암각화가 새겨진 암벽이 있고, 암각화 바로 위의 금장대는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빼어난 경치를 시로 읊은 곳

금장대에 올라서면 남산과 토함산, 소금강산 등 시원한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보물 제62호. 높이는 본존불 685㎝, 좌협시보살 455㎝, 우협시보살 462㎝이다. 본존상은 안산암의 바위면에 고부조로

새겨진 입상이며, 좌우협시보살입상은 별도의 화강암에 새겨진 원각상이다

 

선도산 성모설화

신라 진평왕 때 안흥사의 여승 지혜가 불전을 고치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어느 날 꿈에 선도산 성모가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 밑에서 금 10근을 꺼내 주존 삼상을 장식하고,

벽에 오삼불·육류성중·천신·오악 신군을 그리고, 봄과 가을에 중생을 위해 점찰법회를 베풀라고 했다. 지혜가 깨어나서

신사 밑을 파보니 금 160냥이 있으므로 불전을 수리했다

성모는 본래 중국 왕실의 딸로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운 뒤 선도산에 살다가 지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혁거세와 알영의

어머니라는 설도 있다. 성모가 이 산에 머물며 나라를 지키니 신령스러운 일이 많았으므로 삼사의 하나로 삼고, 그 차례도

여러 망제 위에 두었다고 한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뒤 이전까지의 민간신앙들을 불교로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설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고분군이 소재한 서악동 750번지 일대 2,948평이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4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흔히 ‘경주 서악동 고분군’이라고 한다. 경주시의 서교 서악동 선도산의 서남 자락에 있다

고분군이 있는 지형은 선도산의 서남지맥의 능선이다

 

서악동에 위치한 왕릉으로 전해지는 것 가운데 확실한 것은 제29대 태종무열왕릉 뿐이고, 나머지 5기의 능들은 북쪽의

선도산 동남자락에 있는 고분들 가운데 조선 영조 6년인 경술년(1730년) 이후 전칭되어 오던 것을 1960년 이후 정부에서

사적으로 지정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무열왕릉을 제외하면 서악리에 분포하는 고분들 가운데 최대형분들인 무열왕릉

의 뒤편에 남아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그 위에 분포하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들을 지칭한 것이다

이 고분군 가운데 규모가 크고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앞에 설명한 무열왕릉 뒤에 능선의 상부를 따라 분포하는 무

열왕릉을 포함한 5기의 대형고분들일 것이다

이 고분들은 선도산에서 동향한 능선의 정상부를 따라 위에서부터 1·2·3·4호분, 무열왕릉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고분들은 모두 남향의 돌방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1호분은 높이 8m, 직경 39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의 1.7m 높이에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가 돌려져 있다

2호분은 높이 8m, 직경 40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3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드문드문 관찰된다

3호분은 높이 12m, 직경 60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1.5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보이고 있다

4호분은 높이 10m, 직경 50.9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2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드문드문 관찰된다

이러한 사실은 돌방무덤이 채용되면서 신라의 왕릉이 산록으로 이동한 것이 인정되는 점, 돌방무덤을 채용하면서 왕릉의

규모가 보다 축소되었으나 경주를 비롯한 주변지역에 남아 있는 대형분들 가운데 이 고분들이 최대형분에 해당한다는 점

등으로 보아 앞에 열거한 현재 왕릉으로 전해지는 것들보다는 이것들이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이 고분들이 입지적으로 무열왕릉 직후방에 상하 일렬을 이루고 있는 점, 풍수지리에 합당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점, 봉토의 규모가 전신라시대 능들 가운데에서도 최대형에 속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단순한 왕족의 묘가

아니라 무열왕의 직계조상 왕들의 묘로 비정하여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진지왕릉, 4호분은 무열왕

의 아버지인 용춘(龍春), 즉 문흥대왕릉(文興大王陵)으로 비정하였다

한편 조선 순조 때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그의 추사집에서 『진흥왕릉고(眞興王陵攷)』라는 글을 통해서 이들을

법흥왕릉, 진흥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으로 추정하였다

고분들이 일렬을 이루며 능선의 상위에서 하위로 조영되었을 가능성, 일렬을 이룬다는 것은 직계의 가계를 의미하고 있을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학계 일부의 이러한 비정이 타당하나 아직 증거는 불충분한 상태라 하겠다

한편 무열왕릉의 앞에는 무열왕의 직계 자손인 김인문(金仁問)의 묘와 김양(金陽)의 묘가 자리잡고 있고, 신라의 왕릉들에

나타나는 둘레돌[護石]의 변천과정이 돌무지덧널무덤의 돌담식 다음에는 자연석 또는 깬돌(割石)을 쌓고 버팀돌을 두는 것

임을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으로 보아 알 수 있는데, 앞에서 본 이 고분들이 이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渴波濫 許

아래 공감 하트 꾹 눌러주세요